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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라도의 도박 인생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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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명의 핸드


200-400 테이블에서 받은 K♥Q♥. 테이블을 스캔하니 플레이어들이 차례로 폴드하고 콜하는 가운데, 1,400불을 오픈 레이즈했습니다.


100-200 테이블에서 저는 나름의 이미지를 구축해놨었죠. "저 코리안 레귤러... 피해야 돼." 타이트하고 빡빡한 이미지요. 제가 베팅하면 뭔가 있다고 생각하게끔 만들었거든요. "쟤는 이걸로 밥 먹고 사는 애야." 이런 평판이었죠.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이 폴드했고, 버튼(Button) 자리의 중국인만 콜을 했습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자세와 복장, 표정, 칩 쌓는 각도와 높이만 봐도 최소 몇 년은 한 베테랑이었습니다. 게다가 200-400에 앉을 정도면 자금력도 충분했죠.


그의 스택은 약 40만 불. 홀덤에서는 고액권 칩을 맨 앞에 놓는 게 룰입니다. 상대방이 볼 수 있게요. 그는 10만 불짜리 세 개를 위에 놓고, 나머지는 잔돈으로 풀어놨더군요.


플랍이 열렸습니다.


J♠9♥3♥


"완벽해!"


플러시 드로우에 두 장의 오버카드. 더할 나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보통은 여기서 적당히 베팅하고 콜을 받아 순탄하게 가는 게 좋지만... 처음 200-400을 치는 만큼 뭔가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체크했더니, 상대가 2,500불을 베팅해왔습니다. 약 30초간 고민하는 척하다가 7,000불로 체크-레이즈했습니다. 


"제발 폴드해라... 1,400에 2,500, 4,000만 먹게 해달라..."


간절히 기도했지만, 중국인은 2분간의 장고 끝에 만 불을 더 얹었습니다.


"뭐야... 이게 뭐지?"


잭 페어로는 이런 플레이를 안 할 텐데... 도대체 뭘 들고 있는 걸까요? 고민 끝에 "콜"을 외쳤습니다.


턴 카드가 공개됐습니다.


8♥


너트 플러시(Nut Flush)가 완성됐습니다! 하지만 상대의 카드를 아직 모르는 상황. 잭 트립스나 풀하우스 같은 강력한 패를 들고 있을 수도 있었죠.


그때 중국인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습니다.


"플러시를 완성한 내 패를 읽은 건가? 아니면..."


상황을 정리해보니, 상대는 프리플랍에서 제 1,400불 레이즈에 콜, 플랍에서 2,500불 베팅 후 제 7,000불 레이즈에 1만 불을 더 올렸습니다.


"잭 트립스는 아닐 거야. 그랬다면 여기서 콜만 했겠지. 레이즈는 안 했을 텐데..."


구구절절한 분석 끝에 9-9 정도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제발 스페이드 A만 아니길..."


이제 리버 카드만 남았습니다. 겨드랑이, 손바닥, 그리고 밑도 다 땀으로 축축해진 상태로 딜러의 손끝만 바라봤습니다. 지금까지 쳤던 판돈 중 가장 큰 금액이 걸려있었으니까요.


리버에서 8♣가 나왔습니다.


보드는 J♠9♥3♥8♥8♣.


페라도의 입장에서는 절망적인 상황이 됐습니다. 보드 페어가 나오면서 풀하우스의 가능성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중국인이 이상하게도 카드를 오픈하지 않았습니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고 있는데, 상대가 고개를 저었습니다. 보통은 올인한 사람이 먼저 카드를 오픈하면서 "트립스면 가져가" 이런 식으로 말하는데... 중국인은 달랐습니다.


"유잉(You win)... 유윈... 네가 이긴 것 같아..."


그러면서 J♥T♥를 보여줬습니다.


"이런 미친...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네..."


K♥Q♥를 오픈하면서 엄청난 크기의 팟을 끌어왔습니다. 주변에서 웅성거림이 들렸습니다.


"저 한국 된장 새끼, 킹하이로 저걸 다 올인하네."


"아니야, 특이한 놈이네. 드로우 없이 저렇게 치네."


하지만 이제 그런 소리는 귓등으로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굿런(good run)은 계속되었고, 승리자라는 도취감에 어깨가 으쓱해졌습니다.


마카오에 온 지 두 달도 안 됐는데, 2만 불로 시작해서 60만 불의 디파짓을 만들었습니다. 당시 환율로 1억이 넘는 돈이었죠. 통장에도 8천만 원이 있었고요.


점점 100-200 게임은 지루해졌습니다.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졌거든요. 돈에 대한 감각도 무뎌졌습니다.


"이제 레귤러다. 모자 뒤집어쓰고 슬로우 걸음으로 다녀야지."


람보르기니, 페라리를 보면서 "좀만 기다려. 내가 하나 타줄게" 이런 생각도 했죠.


아침까지 게임하고 배고프면 호텔 조식을 시켰습니다. 과일 몇 개에 커피 한 잔이 8만 원. 이빨 쑤시면서 "오늘도 얼마 벌었네" 하면서 끼니를 때웠죠.


스트레스가 심하다는 핑계로 깜용(按摩: 마사지)을 다녔습니다. 당시에도 1,700-1,800불 했는데, 하나로는 부족했죠. 스트레스가 덜 풀린다며 베트남 여자 둘, 중국 여자 둘, 러시아 여자들을 불러 스트레스를 풀었습니다.


"뭐 어때... 200-400 몇 번만 이기면 다 해결되는데. 내가 스트레스 푸는 게 중요하지. 돈 쓰는 게 중요해. 써야 또 벌리지."


오늘도 따고, 내일도 딸 거고, 모래도 당연히 딸 거라 생각했습니다. 점점 방탕한 생활이 시작됐고, 자신감이 아닌 자만과 교만함이 밑바닥에서부터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안 가서 홀덤에서 돈 잃는 사람들이 이해가 안 됐습니다.


"저 병신들은 왜 저렇게 못하는 거야? 쟤는 재수도 열라 없네."


"야, 너 홀덤 그만두고 한국 가서 농사나 지어."

"너는 상해 가서 농민공이나 해. 너는 홀덤 할 실력이 안 돼."

"그냥 빈병이나 주워."


매일 같이 돈을 따니까 이런 말들이 자연스레 나왔습니다. 하지만 서서히 내리막길이 보이기 시작했죠.


플랍까지는 1등 패였는데, 리버에서 "된장 새끼"가 끝까지 콜콜하다가 마지막 남은 아웃이 떨어져서 지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풀 테이블(9명이 앉는 테이블)에서 블러프를 치면 누군가는 진짜 패를 들고 있었죠.


A♠K♠로 레이즈했다가 2-2가 콜해서 올인까지 가고, 이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그래? 나도 한번 그렇게 해보지."


8♠9♠ 같은 패로 레이즈를 시작했습니다. 실력 있는 플레이어들은 이런 '수티드 커넥터'로 때때로 레이즈하기도 하거든요. 상대가 뭘 들고 있는지 읽기 어렵게 만들기 위해서죠.


그런데 플랍에서 아무것도 맞지 않으면 포기해야 하는데... 플랍, 턴, 리버까지 아침, 점심, 저녁을 다 먹여줬습니다.


아침에 5천 불,

점심에 15,000불,

저녁에 35,000불...


블러프가 전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내리막길을 타고 있다는 게 얼굴에서 다 보였나 봅니다. 원래는 이성적으로 했어야 할 판들인데, 먹을 만큼 먹고 쳐볼 만큼 쳐봤더니 뚜껑이 열려버렸고 평정심이 사라졌습니다.


"아... 원래 실력은 좋은데 오늘 운이 없네."

"하... 저 새끼들이 안 먹어주네 오늘은."


이런저런 잡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점점 자신감이 바닥을 쳤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늘은 큰 맛 보여주자. 진짜 잘 한번 해보자. 너무 무모하게 하지 말고 정교하게 플레이해보자."


이런 다짐을 하면서 포커룸에 도착했습니다. 100-200 테이블로 가다가 봤더니... 봉철이를 닮은, 홀덤을 엄청 못하는 것 같은 사람이 앉아있었습니다.


이마에 "나는 물고기요, 호구입니다. 내 돈 따먹어요."라고 써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었죠. 행색이 초라하고, 옛날 바가지 머리에 완전 호서비처럼 생긴... 한국 애들이 '호섭이'라고 부르는 그 사람.


엄청난 뱅크롤을 가진 '호섭이'. 토끼를 발견한 호랑이처럼 "으응" 하면서 그 자리에 앉았습니다.


[다음 편에 계속...]


# 홀덤 용어 설명

- 오버카드(Overcards): 보드의 가장 높은 카드보다 높은 핸드 카드

- 너트 플러시(Nut Flush): 가능한 가장 높은 플러시

- 체크-레이즈(Check-raise): 체크 후 상대의 베팅에 레이즈로 대응하는 전략

- 장고(長考): 오랫동안 고민하는 것

- 트립스(Trips): 같은 숫자 카드 3장으로 만드는 패

- 풀하우스(Full House): 트립스와 원페어가 함께 있는 패

- 프리플랍(Pre-flop): 첫 세 장의 커뮤니티 카드가 공개되기 전 단계

- 보드 페어(Board pair): 커뮤니티 카드에서 같은 숫자가 나온 경우

- 굿런(Good run): 연속해서 좋은 결과가 나오는 상황

- 디파짓(Deposit): 카지노나 게임장에 예치한 돈

- 수티드 커넥터(Suited Connector): 같은 무늬의 연속된 숫자 카드

- 아웃(Out): 이길 수 있게 만드는 남은 카드

- 풀 테이블(Full Table): 9명이 모두 앉은 테이블

- 물고기(Fish): 실력이 부족한 플레이어를 일컫는 은어

- 뱅크롤(Bankroll): 도박이나 게임을 위한 자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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