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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사연] 도박 소설 - 카지노 인생 20년 겜블러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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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고등학교 2학년. 나는 전교 상위권의 모범생이었다. 부모님은 내 성적표를 들고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니셨고, 담임 선생님은 서울대 진학을 장담하셨다. 하지만 운명이란 것이 참 묘했다. 그날만 아니었더라면, 그 당구장에 발을 들이지 않았더라면...


"형 계신가요?"


아는 형을 찾아 들어선 동네 당구장. 형은 없었지만, 대신 또래 친구들이 초록빛 당구대를 둘러싸고 있었다. 하얀 공이 부딪히는 소리, 점수를 외치는 우렁찬 목소리, 담배 연기 자욱한 공기 속에서 나는 이상한 매력을 느꼈다. 특히 당구를 치는 그들의 모습이 무척이나 근사해 보였다.


버스를 타면 사람들의 머리가 당구공으로 보일 정도로 당구에 빠져들었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때면 친구 집에서 공부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밤새도록 내기 당구를 쳤다. 전교 5등 안에 드는 성적은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고등학교 졸업 때는 그나마 표창장이라도 받았지만, 내 꿈꾸던 대학과는 거리가 먼 학교에 가게 되었다. 당구장이란 불명예스러운 계급장이 내 어깨를 누르고 있었다.




1979년 10월, 스물여섯 살의 나는 희망에 부풀어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하와이를 거쳐 LA를 지나, 목적지인 콜로라도 덴버에 도착했다. 과거의 불성실했던 삶을 만회하겠다는 일념으로, 고학생활을 시작했다. 


"여기서라면 달라질 수 있을 거야."


영어는 곧잘 했고, 당구로 단련된 덕분인지 이과 과목들도 어렵지 않았다. 새로운 시작이었다. 하지만 운명의 여신은 나를 그렇게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3년째 되던 해, 한 여름밤. 룸메이트의 친구들이 들고 온 포커 카드 한 벌. 그것은 내 인생을 다시 한번 뒤흔들어놓을 파멸의 씨앗이었다.




포커는 당구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전략, 심리전, 그리고 무엇보다 큰 판돈이 주는 아드레날린. 주말의 소소한 내기는 점점 커져갔고, 급기야 미국 갱들이 운영하는 사설 도박장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학업은 중도 포기했고,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담배 연기에 찌든 얼굴로 밤새 카드를 붙잡고 있는 내 모습은, 어느새 추한 도박꾼의 전형이 되어있었다.


그때 한국에서 비보가 날아들었다.


"아버님이... 교통사고로..."



아버지는 내가 가장 사랑했던 분이었다. 여러 형제 중에서도 나를 특별히 아끼셨다. 언젠가는 꼭 성공해서 돌아가 효도하리라 다짐했건만, 이제 그 기회는 영영 사라져버렸다.


"이게 다 저의 죄악된 생활 때문입니다..."


며칠을 뜬 눈으로 지새우며 울었다. 차라리 울다가 숨이 막혀 아버지 곁으로 갔으면 싶었다. 그렇게 깊은 참회 끝에 새로운 결심을 했다.


모든 것을 정리했다. 옷가지 몇 개와 책가방 하나만 남기고, 살림살이는 전부 트럭에 실어 채권자들에게 넘겼다. 그리고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1987년, 서른세 살의 나이로 뉴저지 주립대학 입학허가를 받았다. 한국과 미국에서 두 번이나 대학 입학의 기회를 얻은 것이다. 어쩌면 운이 좋다고 할 수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굳어버린 머리로 젊은 학생들 틈에서 공부하는 것은 고행과도 같았다. 하지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한 다짐과, 대학원에 다니던 현재의 아내를 만난 것이 큰 힘이 되었다.




졸업 후, 아내와 맞벌이를 하며 안정된 삶을 찾아갔다. 딸아이도 태어나 집안에 웃음꽃이 피었다. 내 이름의 첫 글자를 딴 회사도 설립했고, 야간 대학원 준비도 시작했다.


"여보, 우리 이제 정말 잘 될 것 같아요."


아내의 눈빛에는 희망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것은 폭풍전야였다. 악마의 질투인지, 도박 귀신의 장난인지... 이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뉴저지 남단 해변에 놀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 애틀랜틱시티의 카지노가 나를 불렀다. '잠깐만', '구경만'이라는 말도 안 되는 자기합리화와 함께 카지노에 발을 들였다.


처음에는 작은 돈으로 블랙잭을 시작했다. 큰돈을 따기도 했다가 잃기도 했다. 하지만 순식간에 신용카드 한도를 초과했다. 이성적으로 대처할 겨를도 없이, 다음날 자석에 끌리듯 다시 카지노를 찾았다.



잃은 돈을 만회하기 위해 더욱 무모한 도박을 했다. 아내가 알아차리기 전에 본전을 찾으려 했지만,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급기야 아내와 딸을 한국으로 보내야 했다.


카지노의 신용대출, 적금 해약, CD 판매, 은퇴연금 인출, 생명보험 해약...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심지어 한국의 연로하신 어머니까지 속여 돈을 빌렸다. 


마지막에는 사채업자의 돈까지 썼다. 카지노에서 살다시피 하는 갱단에 연루되면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미 바닥까지 간 마당에 그런 걸 따질 겨를이 없었다.




집을 담보로 빌린 돈은 나날이 불어났고, 약속한 상환일은 다가오는데 손에 쥔 것은 없었다. 아내가 한국에서 돌아왔을 때는 이미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채업자들이 해결사들을 앞세워 집 주변을 서성였다. 더는 집에 머물 수도 없었고, 아내와 딸도 두려움에 떨며 어디론가 도망쳐야 했다.


얼마 전까지 웃음꽃이 피던 행복한 집이 이제는 죽음보다 더 차가운 폐허가 되었다. 결국 집을 팔아 빚을 갚고, 아내와는 별거에 들어갔다.




형님의 권유로 한국에 돌아와 사진 스튜디오 일을 배웠다. 정말로 열심히 했다. 하지만 IMF가 터졌고, 받을 돈은 받지 못한 채 또다시 벼랑 끝에 섰다.


청담동 비즈니스 룸싸롱에서 대리운전을 하며 새로운 기회를 찾았다. 거기서 만난 펀드매니저들의 정보로 주식투자도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도 도박과 다르지 않았다. 초단타매매로 깡통을 차고, 작전주 따라다니다 또 망했다.




더는 가족도 친구도 믿어주지 않았다. 하지만 포기할 순 없었다. 인력사무소를 전전하며 육체노동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서울 삼성동 봉은사 근처, 한 교수님 댁 신축공사장에서 귀인을 만났다.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인정받아 건설회사 대리로 발탁되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했지만, 밤새워 공부했다. 하지만 2년 만에 회사가 부도났다.



길거리 노점상으로 다시 시작했다. 남들은 천원짜리만 팔 때 과감히 십만원대 제품도 팔았다. 비닐 포장을 과감히 벗기고 고객이 만져볼 수 있게 했다. 그렇게 하루 150만원까지 팔았다.


이후 삼겹살 숙성 아이디어로 또다시 성공했다. 비록 모든 명의는 아내 앞으로 되어있지만, 이제는 가정도 회복되었다. 딸아이도 미웠던 아버지를 용서해주었다.




지금은 손녀를 무릎에 앉히며 평화로운 노년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도박의 유혹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도박의 가장 무서운 점이다.


재산 탕진이나 가정 파괴보다 더 무서운 것은, 바로 뇌 속에 깊이 각인된 도박의 쾌감이다. 한 뼘도 안 되는 뇌 속에 저장된 도박의 긴장과 흥분. 그 기억은 평생 나를 따라다닌다.


지금도 가끔 꿈에서 카지노를 본다. 초록빛 도박대가 나를 부른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곳이 천국처럼 보이지만, 실은 지옥의 입구라는 것을.


이것이 한 도박 중독자의 고백이다. 

마흔 해 넘는 방황, 

그리고 아직도 끝나지 않은 유혹과의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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